한심한 한국인 한국정부 한국언론의 삼한통일(답답한 한국사)
일본 어용사학자의 역사침탈 지금까지 못고쳐
(일본은 왜 삼국유사 고조선 환국을 환인으로 고쳤을까?)
일제 역사 침탈의 후유증은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의 고조선 奇異편이다.
요즘 일본이나 프랑스에서 약탈해간 조선시대의 일부 고서를 반환해 준다고 해서 들떠 있는데,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아직도 우리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는 고대사서들은 밀실에 사장된 채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자랑스러운 후손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부나 각종 언론에서는 최근 반환되는 조선왕조의궤에 대해 마치 모든 잃어버린 역사를 찾은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선과도 큰 업적이기는 하나, 진정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고대사에 대해 언급 되었던 한국고대사서 원본을 찾는 일이다. 그러기에 근대사 중심의 역사에만 집착하는 정부,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포장하는 언론, 쉽게 속아 넘어가는 한국인이 안타깝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환인-환웅-단군의 계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고조선에 관한 문헌근거는 삼국유사 정덕본으로 원본에는 '昔有桓国'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당시 일본학자인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의도적으로 원본에 붓으로 가필하여 '昔有桓因'으로 만들어 전국 관공서에 보낸 것이다. 다행히 숙종 때 발간된 책 중에서 규장각에 보관된 삼국유사가 당시 육당 최남선에 의해 발견되어 "賤人의 妄筆"이라고 규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그 후유증은 광복 이후 모든 교과서나 기록물에 일본인 이마니시류(今西龍)가 날조한 역사가 활개를 쳐, 많은 학자들이 僞本을 原本으로 알고 부정확한 논문을 써왔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현재까지 모든 교과서에 실린 桓因이란 표현은 금서룡에 의해 왜곡날조되어 전국 관공서에 퍼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과서에 삼국유사의 원본을 실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재작년에 교과부 동북아역사왜곡대책반에 본건을 제안으로 올려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아 교과서에 실어달라고 제안을 했으나 1년이 지나 작년 12월에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들은 내용은 역사왜곡대책반에서는 '독도 관련' 업무에 한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서와는 해당 없으니 교과서 담당 부서에 의뢰하라고 한다.
동북아 역사문제는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 예민한 문제이다. 때문에 이 분야에서 일하는 공무원은 한국인으로서 소명감을 갖고 역사적 편린이라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심각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일본의 의도대로 고조선에 관해 아예 부정하는 태도까지 보이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고 조선이 일본보다 2,000여년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단군조선 관련 2,000여년의 역사를 없애기 위해 조선을 병합하자마자 의도적으로 고조선 관련 역사서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단군조선 관련 역사서는 병자호란 이후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후대에 꾸며진 것처럼 선전해 왔다. 그 의도는 오직 조선사 2,000여년을 삭감하기 위해서이며, 일본과 조선의 역사적 뿌리가 같다는 "日鮮同祖論"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단군조선 47대 왕조 관련 서적은 환단고기, 규원사화, 신단민사 등에 구체적 치적을 소개했으나 <삼국유사>는 장구한 역사를 "古記云(옛기록에 말하기를)"으로 시작하여 다만 몇 줄에 함축하여 언급했기에 한 글자만 고쳐도 고조선의 장구한 역사를 왜곡날조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요즘 경기도교육청에서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은 국가적 정체성에서 지극히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교과부가 반기를 드는 것은 어쩌면 교과부가 해야할 일을 경기도교육청이 앞장서서 하기 때문에 주도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불쾌한 표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의 실수로 잘못된 용어들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高句麗'이다. 우리는 대부분 '고구리'라 하지 않고 '고구려'로 읽는다. 그러나 '麗'의 음은 '리와 려'음 두 가지가 있다. 즉 '나라이름 리'와 '아름다울 려'의 두 가지로 쓰인다.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도 '高句麗'는 일본어로 '고쿠리' '高麗'는 '고라이'로 발음한다. 주변국 일본인들은 '리'와 '려' 발음을 분명히 표현했던 것이다.
단군조선 47대를 언급한 대부분의 책들에서는 제3대 가륵임금이 가림토(고대한글) 38자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은 세종실록 28년조에 "皆本而非新字也古篆字模倣(대개 그 근본은 새로운 자가 아니라 옛 글자를 모방했다)"이라고 언급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일본인들이다. 조선을 병합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시기한 일본은 한글을 비하하려는 의도에서 창살을 모방하여 만든 '창살문자'라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본토의 아히루 신사에서 고대한글인 아히루 문자가 발견되었는데 그 제작 시기가 和同元年(708년)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 발견된 아히루 문자(가림토와 매우 유사함, 특히 현재의 'ㅎ'에 해당하는 자음을 통해 그 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음-사진 참조)는 아버지 문자이고 조선에서 1443년에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는 아들 문자라 하여 아히루 문자와 훈민정음은 親子관계에 있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세신궁에서 발견된 8세기로 추정되는 청동거울에도 고대 한글 자모로 추정되는 글씨가 쓰여 있다.
이것은 삼국과 일본의 역동적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즉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하여 倭로 건너가 각종 神社를 세웠고 신사에는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신사에서 쓰이는 주문들은 고대 한국의 신교문화를 고대한글인 가림토로 기록되고 가림토의 음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과 한글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일본이 조선에서 압수한 서적만 20만권이 넘는다고 한다. 그 서적 중에는 후손들의 무지를 한탄하며 일제에 의해 깊숙이 감추어진 서적도 있을 것이다.
단군은 보통명사다. 檀君을 훈차하면 '박달(밝은나라)임금' 즉 '배달임금'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 의해 왜곡된 역사로 인하여 우리는 단군조선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심지어는 단군을 우상으로 여겨 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다. 언젠가 일본의 양심 있는 정치가에 의해 한국의 고대사에 대한 진실이 열린다면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조상과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삼국시대 말에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해 일본을 건국했고, 그 일본은 자신들의 뿌리가 백제에 있음을 밝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역시 강력한 막부정권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켜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을 것이고,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유전적으로 움츠러든 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새로운 무기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완전한 식민지를 위하여 日鮮同祖論을 내세운 일본으로서는 단군조선 2,000여년의 역사가 두려웠을 것이며, 그로인하여 일본인들은 단군 47대 행적을 기록한 각종 고서를 지금까지도 위서라고 일축해 버렸다. 지금도 일본 어딘가에서 비밀리에 감춰진 고대 한반도 역사서들은 우리의 혼을 간직한 채 축축한 어둠에 싸여 있다. 언젠가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찾아 주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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