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신문사와 투고인에게
‘두나’ 그렇게 하면 인기 ‘뜨나?’ 한겨레 신문 이젠 ‘반겨레 신문’으로 개명해야 할 때
2006년 4월 20일자 31면 게재된 내용 중 핵심내용 발췌
<생략> 하지만 나에겐 더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공식 행사에서 스승이라는 말을 쓰는 것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처음부터 금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소정의 자격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럼 일반적인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은 무엇인가? 별 거 아니다. 학교 다니는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애들을 가르칠 만한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자.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 그걸 내가 억지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인간 쓰레기들에 대한 공포담을 서너 개 이상 알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 직접 몸소 체험한 것이다.
듀나/영화평론가·소설가
이 글에 대한 나의 생각
교육은 미래 지향적이다.
때문에 눈앞의 현실적 문제에 급급하는 것보다는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일 것이다.
스승의 노래의 내용이 스승을 미화하고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한 것은 교육적인 면에서 참 바락직한 내용이다.
대부분의 현직 교사들이 교단에서 스승의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마음은 나와 같을 것이다.
첫째, 옛 스승에 대한 감사한 마음
둘째, 학생들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에 대한 반성
셋째,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는 각오
등을 떠올릴 것이다.
제 주변에는 학교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들이 많다.
턱없는 예산 부족에도 불구하고 학교의 발전이 지역사회의 발전이라는 신념으로 모교에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려는 교장 선생님과 당신의 뜻이 선생님들에게는 힘들지만 그것이 학생들을 위한 길이기에 힘들지만 흔쾌히 협조하는 선생님들 학생 생활지도 문제로 부모보다 더 열심히 상담하시는 선생님들 ···· 참 아름다운 교무실의 모습이다.
이 분들에게
당신은 촌지를 얼마나 받았습니까?
당신은 맘에 드는 학생을 몇 명이나 성폭행했습니까?
당신은 미운 학생들에게 얼마나 화풀이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 분들의 예상되는 반응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한 명의 작가와 한 신문사가 무심코 저지른 사건이 어떤 영향을 줄 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학생 시절 그런 부정적인 모습들만 보고 자란 사람이 작가나 비평가라면 그 삐뚤어진 사고로 무엇을 창작하고 비평하겠습니까?(이래서 교육의 효과가 무섭다. 삐뚤어진 교육자는 ‘삐뚤이’를 낳는다.)
불쌍한 ‘두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 이런 과정에서 성숙하는 것이 인간(人間)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지역사회, 초·중·고와 대학 그리고 직장 등을 통해 사람간의 간격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또 바람직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도 대인관계가 중요한 것이며, 특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는 성공의 관건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두나’가 만났던 교사들은 획일적으로 악마와 같은 모습을 띤 모습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성장과정이 불쌍한 사람이란 말인가?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도 악마적인 교사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불쌍한 학생이었겠는가? 또 그 정신적인 피해가 얼마나 컸으면 이토록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단 말인가?
내 경험으론 사람은 상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고 한다. 학생을 지도해 보면 가끔 이유없이 반항하고 교사를 불신하는 학생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사를 신뢰하고 학급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학생이 미워서 감정적으로 구타하는 교사가 있을까? 교사는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며 부득이한 교육벌을 제외하고는 육체적인 체벌을 삼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을 악용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학생들에 대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현직교사라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징계를 하자니 학생에게 불리하고 묵인하고 계속 훈계하자니 자신의 속이 터질 지경일 것이다. 그렇다고 체벌을 가하면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오히려 이런 학생들은 교사를 곤혹스러운 지경까지 몰아갈 수도 있다.
이러한 경험으로 볼 때, ‘두나’란 사람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을까? 참 의아스러울 뿐이다.
무책임한 ‘반겨레 신문사’
처음에 분단 겨레를 통일시킨다는 목적으로 한겨레 신문을 만든 고매한 취지는 어디로 가고 ‘반겨레 신문’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한 때 손잡고 일했던 동지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민족의 단합을 방해하는 반민족적 행위를 해도 이제는 괜찮은 것인지 염려스럽습니다. 또한 편집국장이나 신문사를 책임질 만한 사람들은 이 기사가 일으킬 파문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직무 유기를 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문제는 한겨레 신문사가 마치 정부의 기관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개혁에 방해가 되는 것이 교사’라고 했기 때문에 모든 교사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한겨레 신문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려고 지적 도덕적 검증도 받지 못한 ‘두나’라는 작가에게 의뢰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과거 군부시대에 언론을 탄압하여 군부의 뜻을 국민들에게 세뇌하여 국민들을 우민화시켰던 것처럼 이젠 반겨레 신문사가 국민 우민화 정책에 앞장서는 정부 기관지가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지금 사회적인 분위기는 모든 것이 경제의 논리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개혁에 가장 방해되는 집단은 교사’라는 대통령의 발언을 비롯하여 인격적인 교사보다는 ‘특성화 학교’ 또는 ‘자율 학교’라는 명목으로 특수 기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굉장한 CEO인 것처럼 미화하고 있는 교육의 현실태가 그렇습니다.
교육부장관은 농어촌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것처럼 매스컴은 정부의 의지대로 과대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농어촌 학교들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현대식 건물에 통폐합되었지만 적절한 예산을 지원해 주지 않아 학교 운영을 정상화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근원적인 이유는 현대식 건물에 중앙냉난방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즉, 학생은 소수인데(개별 난방이면 더욱 경제적일텐데···) 현대식 중앙냉난방장치는 시설유지비가 비싸 학생들의 교육권를 박탈해가는 괴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학교예산이 건물 유지비로 투입되어 실제로 학생들의 교육활동비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농어촌 통합현대화 시범학교들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합니다.” 특히 올해는 전체적으로 예산이 감소한데다가 초·중·고 통합학교의 경우 초·중·고 학급수를 모두 합쳐 고등학교 학급수 기준으로 예산을 배정하기 때문에 일반학교와 같이 지원받을 경우 통합학교의 경우는 시설 유지비를 지출하고 나면 교육활동비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예산도 인건비와 건물 유지비를 제외하면 순수교육활동비가 2천 5백만원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이것은 중산층 한 가정의 일 년 예산도 못되는 것입니다. 아마 강남에 있는 도시 학교에 정부에서 이러한 예산을 지원해 주었다면 학부모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농촌 주민들과 학부모를 무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예산지원이 가능한지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농어촌 주민들은 공교육과 정부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미래 사회의 준비기관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순수해야 할 곳이 단순한 기능을 연마하는 기능주의로 전락한다면 목전의 취업에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겠지만 먼 교육적 안목으로 보았을 때는 더욱 심각한 병폐를 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교사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다른 집단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고교 졸업 후, 사범대학에 가고 싶어서 스승으로부터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추천 입학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수만 되면 가는 곳, 특히 IMF 이후엔 밥벌이하는데 가장 안정적인 직장으로 개념이 변질된 듯합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변별력 없이
과거에는 사범대학 출신만 교직에 나올 수 있었으나 헌법상의 평등권에 위헌이라는 판정으로 요즘은 사범대학뿐만이 아니라 일반대학에서도 교직을 이수한 학생들에게는 교원임용고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물론 1차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면접에서 교사의 자질을 검증한다고 하지만 면접에서는 큰 결격사유가 없는 한 대부분 1차 성적에 의해 당락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결국 이러한 제도로 말미암아 사회인들이 요구하는 성직자로서의 교사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신하건대 대한민국 종교 성직자 단체를 제외하고는 가장 깨끗하고 순순한 단체가 교직에 종사하는 교사들이라 믿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육현장에서 묵묵히 교직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파렴치한 교사들의 부도덕적인 행위와 매스컴의 경쟁적 과대광고에 의해 국민들은 그들의 의도대로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항상 죄는 소수가 짓고 벌은 전체의 집단이 받는 것처럼 국민들의 교직에 대한 평가는 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선생님들께서 다른 일반 단체들의 구성원들은 더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왜 우리만 쇠방망이냐?”는 불만을 가지시는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학생들의 인격 형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도 않거니와 인간의 전인적 발달에 영향을 주는 전문직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미성숙한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있으며 우리의 언행과 인격이 학생들에게 잠재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나 매스컴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가끔 “돈만 있으면 누가 선생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 교직에서 물러나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앞의 글에 대해 분노하지만 분노에 앞서 자성의 계기로 삼아 경각심을 갖고 새로운 마음과 각오로 교육현장에 서야 할 때입니다.
현 교직단체들 각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언론에서 가장 공격하기 좋은 대상이 교직단체라 합니다. 다른 단체들은 매스컴의 부당한 공격을 당하면 집단 민원 또는 집단 전화 및 팩스 등을 이용해 업무를 방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은 막상 무슨 일이 생기거나 부당한 생각이 들어도 누군가 대신해주겠지 하는 믿음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교직 단체도 자신들의 영리적인 이익에만 신속히 대처할 뿐 정작 교권옹호나 교육의 전문성 신장에는 뒷전인 듯한 인상을 많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우리 교사들도 서로 간에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외부에서 보기에 교사 집단이 가장 단합이 안 되고 선후배가 위계질서도 없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첫 발령을 받은 교사나 경력 25년이 넘은 교사나 동등한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교직은 인격적인 사람들의 만남이고 교사의 자율성이 보장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선배교사들은 연공서열로 대접받으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부단한 자기연찬을 해야 할 것이며, 후배 교사들은 교직에 대한 초심적 열정과 창의적이고 새로운 교수-학습 방법을 통해 선배교사들에게 자극을 주고, 선배 교사들의 학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학교와 지역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 신세대와 구세대 교사간 갈등의 관계가 아닌 상생의 관계를 통해 즐거운 학교 분위기를 만들고 사제가 함께 즐기며 배울 수 있는 즐거운 학교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여 더 이상 ‘두나’와 같은 외부인이 교사와 공교육에 대해 비판하는 일이 없도록 자중해야 할 것입니다.
2006년 4월 27일 한관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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