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과 도끼의 사랑
한관흠
바다 향기와 남포 오석의 묵향 그윽한 웅천중학교 초임 발령 시절의 일이다.
첫 발령을 받고 며칠 후, 신고식을 겸한 회식자리에 따라갔다. 술이 얼큰해졌을 때 선배님들이 갑자기 노래를 하라고 한다.
타고난 숫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니와 왠지 어색하고 겸연쩍어 스스로 노래를 부른 기억이 없는 터이라 그 날도 쉽게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유교적 가정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부모님께서 노래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거니와 매번 이런 자리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일이 나로서는 심히 못마땅했다.
이리 저리 미루었지만 꼭 불러야 한다기에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저는 평소 노래의 중요함도 모르거니와 제가 아는 애국가나 동요를 불렀다간 이 좋은 분위기에 물을 끼얹는 격이라 부를 수도 없고 안부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다만 여러분께서 양해를 해 주신다면 평소 제가 즐겨 암송하던 천부경 81자나 암송하려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이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곁에 있는 선배님들이나 동료들은 너무 신기한 듯 “그러면, 天符經(천부경)인지 뭔지 그거라도 한번 해 봐.” 하였다.
마지못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멋쩍은 입을 열었다.
“일시 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본심본 태양앙명 인중천지일 일종무종일”
입을 뗌과 동시에 좌중이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81자의 짧은 경이지만 분위기로 보아 일각이 여삼추와 같았다. 그렇다고 중간에 그만 두자니 자존심 상할 일이기도 하다. 너희가 나에게 억지로 시켰으니 나도 보란 듯이 좀 떨리고 쑥스러웠지만 마지막‘일종무종일’까지 독경을 마쳤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주변에 썰렁한 분위기가 엄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초임 때 신고식을 대신한 회식 장소로 인하여 나는 주위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어서 한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한 선생, 대단한데 그려. 남과는 다른 유형이야.”
“무슨 말씀이신가요?”
“여태껏 자네 같은 후배는 처음이야.”
“요즘 사람들 대부분 서구 지향적이고 외적인 모습에 매료되기 십상이지. 그런데 자네는 무언가 우리 것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멋져 보이는 걸.”
“사실 내가 춘란을 키우고 있는데, 얘들 기르는 재미가 참 오묘한 맛이 있거든.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겠나.”
“나도 처음엔 서양 란에 관심을 보였는데, 외적인 화려함만 있지 춘란처럼 내적인 아름다움이 없거든. 지금 얘네들을 키우면서 취미로서의 완상물이 아니라 자식 같은 애정이 간다네.”
“예, 선배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조만간 시간 내서 찾아뵙겠습니다.”
며칠 후 선배님의 댁을 찾아 갔다.
알려준 집 근처에 가니 처마 밑에 정말이지 수석과 난과 분재가 어우러져 있는 집이 나타났다. 한 눈에 보아도 ‘저 집이 선배님 댁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을 정도였다.
선배님의 안내로 집안에 들어가니 베란다엔 온통 난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밖에 있던 난과는 다른 놈들로 가득했다.
밖에 있는 놈들은 파랗고 싱싱한 난이요, 안에 있는 난들은 하나 같이 이상한 놈들만 골라 놓았다.
잎새 빛깔이 노란 놈이며, 호랑무늬처럼 알록달록한 놈, 뱀 껍질처럼 노란색 바탕에 검으스름한 점들이 흩어져 있는 놈, 가운데 노란 줄무늬가 모여 있는 놈, 잎 끝에 손톱처럼 가늘게 흰 무늬가 있는 놈, 잎줄기를 따라 길게 실선들이 늘어져 있는 놈
꽃이 쭈굴쭈굴 이상한 놈, 꽃잎이 기형적으로 적거나 많은 놈, 꽃은 있되 잡스러운 티가 없는 놈, 꽃 색이 노란 놈, 꽃을 화려하게 채색한 놈, 키가 작아 짜부란
하여간 집안에 있는 놈들은 정상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추한 것도 많았다.
난을 처음 대했던 나는 몹시 궁금하였다.
“이런 풀들을 집 안팎으로 잔뜩 모아 놓은 이유는 뭡니까?"
"하필이면 이상한 놈들만 집 안에 들여놓았습니까?"하고 물었다.
“집 안에 있는 애들은 좋고 귀한 난이고 밖에 있는 저 놈들은 보통 난이기 때문이지.”
‘기형의 난은 좋은 난이고 정상인 난은 보통의 난이라.’
참 묘한 일이다.
어쩌면 사람의 세상에서 부족한 사회복지 제도가 난의 세계에서는 가장 잘 구현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상인 것은 대우 받지 못하고, 비정상이기 때문에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 난의 세계다.
난처럼 기형이 대우받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기형이라서 특이하다고 해서 서로 욕심내고 정상적인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쏟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한 선생 이번주 일요일에 미산으로 산채가려 하는데 동행하지 않겠나." 하는 선배님의 물음에 대답 대신
"어떤 난이 좋은 난으로 자랍니까?"
"좋은 난은 어떤 끼를 가지고 있나요."
나는 간다는 말 대신, 이미 산행에 동행한 기분으로 초등학생처럼 마냥 신기한 난의 세계에 들떠 있었다.
난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기에 끼를 발견해 낼 줄 알고 그 끼가 발현되도록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고 한다.
난이야말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싹수를 알아볼 수 있는 놈이다.
산채(山菜)할 때에 새싹을 잘 살펴보면 요놈이 훗날 어떤 모습으로 자라 어떻게 효도할 것인지 미리 가늠해 볼 수 있어 재미있다.
난연이 깊은 사람들은 난은 아침 햇볕을 좋아해서 볕이 잘 드는 동쪽을 즐기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도 '蘭=艸+門+東' 의 결합이라고 난의 생태적 습성을 고려해서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門자 안의 글자는 동쪽을 의미하는 東자가 아니라 신중을 기해 고른다는 柬자이다.
내가 교사이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난이란 한자에는 교육적인 오묘한 이치가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다.
난은 야생의 풀 중에서 끼가 있는 놈을 가리어서 문하생으로 들이는 것[蘭=艸+門+柬]이리라.
일찌기 孟子께서 天下의 영재를 얻어서 敎育하는 것이 君子의 三樂이라 했던 뜻을, 나는 난을 통해서 그 의미의 일부이나마 깨달은 듯하여 기쁘다. 요즘이야말로 다양한 분야에서 천하의 영재가 될 재목을 미리 알아 볼 수 있는 교육적 혜안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의 잠재 능력을 조기 발굴하여 사랑과 정성을 쏟아 기른다면 그들이 지닌 자신의 잠재 능력은 난과 같이 아름다운 꽃과 향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결코 스승으로 인하여 무에서 유의 인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재를 키운다는 것은 이미 잠재된 끼를 지닌 학생이 그 가치를 발현하도록 안내를 하고 상황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서 잠재된 재능을 실현된 능력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제자의 끼를 앞세우면 사랑의 교육이요, 스승의 도를 앞세우면 강압의 교육이 된다. 끼를 길러 도를 이룸이요, 도를 앞세우고자 끼를 찾으면 道가 끼[氣]를 찍는 ‘도끼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제자가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탐구하는 자율학습이 아니라, 학생의 끼를 억압하는 교사 중심의 타율학습이자 강제 학습이 되어 도리어 잠재된 끼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나는 난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여 나보다 부족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보다 뛰어난 끼를 지닌 제자에게 그 ‘끼’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며, 난 네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꽃을 피우는 것처럼 난처럼 살아가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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