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교육자료

음력 4월 8일은 해모수 탄신일?

산과 물 2006. 5. 18. 17:43
 

우리는 음력 4월 8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잘못 알고 있다. 
원래 4월 8일은 북부여를 세우신 해모수 할아버지의 탄신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날을 타종교에게 빼앗기고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를 잃고 헤매는 한인들이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당당하게 살아가며 이제는 자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이 글을 쓴다.

 

* 해모수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기원전 239년 임술년 4월 8일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신국인 태백산에서 내려오셔서 천왕랑이라 칭하셨다. 천왕랑은 황제를 지칭한 것으로 역사상 해모수 할아버지 한 분이다. 원래 4월 8일은 해모수 할아버지의 탄신일인데 후대에 불교가 전래되어 석가의 탄신일로 대대적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원래 석가의 탄신일은 2월 8일이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신과 같은 눈빛으로 사람을 꿰뚫어 보셨다. 웅심산 난변에 궁실을 쌓으셨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고 오룡거를 타셨다. 신하 500명과 함께 아침에는 지상에서 정사를 보시고 저녁엔 기도를 통해 하늘 세계의 영과 통했다. 이 무렵 단군 조선이 무너지고 거수국들이 여기저기서 반기를 들고 일어나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중국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군웅들이 활거 했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중화족의 도적들을 막기 위해 번한의 영토를 모두 차지했다. 전쟁터에서 그 용맹을 떨치셔서 한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 북부여의 탄생과 역사

기원전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북부여의 탄생을 알리셨다. 연호법을 세우시고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을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을 대비토록 하셨다.


기원전 232년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단군 조선의 5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제를 철폐하게 하셨다. 단군 시대에는 큰일이 발생하면 오가의 회의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들을 무마 시키고 새로운 정치를 펴야 했다.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단군조선은 중화족들에게 짓밟힐 위기에 처해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국가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양 태모법을 세우셨다. 공양이란 임금이 현자를 부양하는 예절을 뜻하며 태모는 태교를 말한다. 공양 태모는 현자를 받들고 태아의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법이었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좋은 법을 만들고 교화를 하셨으나 항상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기원전 229년 북막의 추장 산지 객륭이 영주(요녕성 추현)를 습격하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을 해갔다. 해모수 할아버지께서는 즉각 응징할 수 있었으나 백성들의 교화와 정권의 안정이 시급했기 때문에 다음 기회를 기다리셨다.


기원전 221년 번조선의 왕인 기비가 죽어 아들 기준이 뒤를 이어 왕으로 봉하시고 연나라를 대비하도록 이르셨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서쪽 변방을 습격하여 북부여를 괴롭혔다. 해모수께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만번한을 국경으로 삼아 휴전협정을 맺었다. 그 다음해 해모수께서는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시고 7월에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천안궁이라 하셨다.


다음해 중화족의 하나라와 진나라의 사이는 날로 나빠져 갔다. 한나라 공신 장량이 창해 역사 여홍성에게 진나라 시황제를 박장사에게 저격케 하였으나 실패하고 부차만을 박살내 버렸다. 이로 인해 진과 한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나라의 농민 반란의 지도자인 진승이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쳐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 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당에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하여 감독케 했다.


기원전 202년 연나라의 노관이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난하)로써 경계를 삼았다. 기원전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자 노관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광명을 요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한나라와의 관계악화를 우려 하셨기 때문이다. 번조선(기자 조선)의 왕인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것이 후에 기자 조선이 위만조선으로 나라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천왕랑 해모수께서 붕어 하시고 태자인 모리수가 즉위 하였다.

북부여는 2세 단군 모리수, 3세 단군 고해사, 4세 단군 고우루(해우루), 5세 단군 고두막, 6세 단군 고무서를 끝으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으로 역사를 이었다.

 

* 해모수 탄신일을 경축한다.

북부여의 시조인 단군 해모수께서는 단군 고열가 57년 4뭘 8일, 23세에 하늘로 부터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로 매년 음력 4월 8일이면 대대적으로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 날은 온 백성이 모여 한 마음으로 축제를 열고 신명나게 즐겼다. 이후로 매년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석가는 기원전 560년에 네팔에서 탄생하였으며 기원전 525년에 부처가 되었다고 기록이 전해진다. 기원전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의 승려 운도에 의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점차 불교가 융성해지고 세력이 커지면서 대대적으로 거행되는 해모수 할아버지 탄신일을 슬쩍 석가탄신일로 바꾸어 놓았다.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음력 4월 8일에 석가탄신일이라고 행사를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2004년도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나라 네팔에서 온 승려가 직접 행사에 참석을 하기도 했다.

 

자손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우리의 선조이신 해모수 할아버지의 탄신일을 되찾아 대대적인 행사를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해야 한다. 또한 그 날을 기리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한화(무궁화)등(燈)을 달아 온 누리를 찬란한 광명의 빛으로 밝혀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출처: 다음 검색

 

해모수(解慕漱) 신화

【출전】고구려 건국신화. {삼국유사} 권1 '북부여조'와 '고구려조'

  옛날 하느님이 흘승골(訖升骨)이라는 곳에  내려 오시어 도음을 정하고 나라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라 했다. 그 아들을 낳자  이름을 부루(夫婁)라 하고 동부여로 옮기게 해서 부루는 거기서 아들  금와를 얻었다. 부루가 죽은 후에 금와가 왕이 되었다. 하루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는 곳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그 내력을 알아  낸 후 부인을 방에 가두니 이윽고  알을 하나 낳았다. 유화(柳花)는 수신(水神)인 하백(河伯)의 딸이고, 그에 일광(日光)이  비쳐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 알에서 나중에 씩씩한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커서 특히 활을 잘  쏘므로 그 나라 말에 주몽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는 금와왕 곁을 떠나 졸본 부여라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고구려이며, 주몽은 곧 시조 동명왕이다. →  동명왕, 금와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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