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우리 역사를 알아야 되는가?
영국의 외교관이며 정치학, 역사학 교수였던 E.H 카(1892 ~ 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여 역사는 과거의 지나간 사실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살아 생동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은 과거의 올바른 역사의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지금의 이 시대의 문명을 진단하는 역사가들은 위기의 시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위기라는 말은 인류가 위험속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더 나은 시대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전락하느냐 하는 전환점의 시대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a turning point for better or worse in an illness) 이러한 위기를 야기한 원인에 대해서는 산업발전에 따른 공해, 윤리와 도덕의 타락, 인구의 폭발과 전쟁의 위기 등등을 들 수 있지만, 이러한 것에 못지 않게 가장 중요시되는 위기는 주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현대인은 자기의 신원(身元, identity)과 소속감을 상실한 외로운 방랑자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민족과 세계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민족의 역사는 어떠한가, 우리 민족의 근본정신은 무엇인가 등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보다는 향락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잃어버린, 가치관을 망각해 버린 인간 정신사의 타락이 현대의 가장 큰 위기라고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배부른 나라일수록 자신을 잃어버리고 허무, 고독, 인생의 무의미의 짙은 안개속에서 신원불명의 인간으로 전락하여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만해 한용운도 [조선독립의 서]에서 "越鳥는 南枝를 생각하고 胡馬는 北風을 그리워 우나니 이는 다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함이라."라 하였고 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자기가 태어난 굴을 향하고 죽는다고 하니 근본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미물이나 동물에게 있어서도 나타나는 진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민족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공부하고 체득하는 것은 한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지금 우리민족은 몸은 국산이지만 정신은 외제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 빠져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각자 자기 목소리만을 높이고 남의 사상이나 생각을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국론분열의 난맥상이 판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현실을 바라보면, 서구의 물질만능주의에 도취되어 향락과 사치, 성개방의 풍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우리의 대학사회를 보더라도, 이제 무언가 희망과 포부를 안고서 첫 출발을 하려고 하는 신입생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며,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외래의 이념에 무비판적으로 빠져,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의미 없는 싸움을 하다가 결국에는 값없는 시대의 희생물이 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의 방탕한 생활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들이 방황하는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신원(Identity)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살다가 또 어디로 가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소속감은 올바른 민족의식을 가질 때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의 영역이 바로 민족이고 또한 나 자신은 민족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민족의식은 올바른 민족의 역사를 알때 비로소 가질수 있게 됩니다. 역사공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정신을 버린 채, 한푼의 가치도 없는 서양의 저급한 물질주의에 빠져서 주체성을 상실한, 넋나가고 얼빠진 민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몸은 국산인데, 정신은 외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드웨어(컴퓨터의 몸체)는 국산품인데, 소프트웨어(컴퓨터 언어)는 외제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만을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는 고유한 종교와 사상이 없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민족은 있으되 역사는 없고, 아니 역사는 있으되 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 역사는 어렴풋이 알되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知所先後면 卽近道矣리라."는 말씀은 지금의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정곡을 찌른 말이라 할 것입니다.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미국 사람과 유학생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데, 각자 자기 나라의 고유한 춤을 추는 시간에 우리나라 사람들만 고고와 디스코를 추어서 망신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과연 우리자신을 살펴볼 때, 몸도 국산이면서 정신세계도 국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정신세계의 무국적 현상을 타파하는 길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길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지만 지금의 우리 민족의 상황을 돌아보면 이 말은 이제 "너의 민족을 알라." 고쳐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단군세기 서]에 "國猶形 史猶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라는 것은 우리의 몸뚱아리와 같고, 역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혼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는 바꾸어서 말하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나 국가는 혼 빠지고 얼빠진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비록 있더라도 후세들의 기를 펴주고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는 역사교육을 실시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속담에도 엄하게 기르되 氣는 죽이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의 우리의 역사 교육은 학생들과 우리 민족의 氣를 살리기 보다는 죽이는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끝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이기백 저, 한국사신론 서문)
"우리 겨레가 처음 어디서 살았는지 분명치 않으나 단군신화가 말하는 고조선이 대동강 평양 근처에 세워진 것만은 사실이다."(국정교과서의 한 대목)
"대동강변에 설치된 한사군은 원시적 국가 형태로 볼 것이나 韓민족은 漢나라의 식민지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는 변칙적인 과정을 밟았다."(김철준, 한우근 저, 한국사 개론)
"한국사는 반도의 태반을 漢族에게 빼앗김으로써 上古에 있어서 외래족에게 굴복하는 선례를 남겼다."(이병도 저, 한국사 대관)
석주 이상룡(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냄) 선생은 노예역사의 교육은 노예국민을 만든다 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무정신의 역사가 무정신의 민족을 낳고 무정신의 민족이 무정신의 국가를 만드나니 이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라 하셨습니다.
역사의 실례를 들어 보더라도 민족의 역사와 주체성이 확립되었던 고구려, 백제, 대진국 등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민족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었지만 외래 종교인 불교에 빠지고 사대주의에 물들었던 신라에서는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영토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단군세기 서]에 있는 다음의 내용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그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나아갈 사람들의 기상보다 더 먼저할 것이 없고 역사 공부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 것은 왜 그러한가? 역사가 밝지 아니하면 민족의 미래의 지도자들의 기백이 떨쳐지지 못하고, 그들의 기백이 살아나오지 못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치의 법도가 분열되느니라."
- "爲國之道가 莫先於士氣하고 莫急於史學은 何也오. 史學이 不明則 士氣가 不振하고 士氣가 不振則 國本이 搖矣요 正法이 岐矣니라."
2. 우리의 역사가 왜 왜곡되었나?
주체성을 상실한 선조들에 의해, 我와 非我도 구별치 못했던 얼빠진 조상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역사가 왜곡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단재는 "조선사는 내란이나 왜구의 병화에서보다 곧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탕진되었다 하노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할 때 민족사학자들은 三毒의 害와 외래종교의 영향을 꼽고 있습니다. 三毒이란 中毒. 倭毒. 洋毒을 말하는데, 中毒이란 한국은 예로부터 중국에 예속되어 살아왔고 우리 자신을 중국에 조공이나 바치면서 반도안의 小中華로 만족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요, 倭毒이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뒤에 한국은 일본문화의 한 지류이며 그 혜택을 받고 성장해 온 것처럼 식민사관에 물든 것이요, 洋毒이란 해방 이후 서구의 문물과 사상에 물들어 우리의 역사를 내려 깍는 것입니다. 이것의 공통점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위대성을 망각한 채 자기 비하, 자기 학대, 피지배의 열등민족의 역사관을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한가지 한가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中毒(事大主義 史觀)
우리나라의 사대주의 시작은 진평왕(26대) 30년(608) 원광법사를 통해 당나라에 乞兵表를 지은 것 등을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무열왕 김춘추가 A.D. 648년에 당에 들어가 浿江以北의 땅을 당에 바치기로 하고 羅唐密約을 맺어 事大의 길을 열고 신라 28대 진덕여왕 4년(650년)부터 당나라 고종의 연호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에서는 崇唐, 고려에서는 事宋, 조선시대에는 崇明이 국시(國是)로서 자리잡는 결과를 낳았고 주체성을 상실한 사대주의 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 역사가 쓰여져 역사가 왜곡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非我的입장에서 쓴 대표적인 사대주의 史書로서 김부식의 父는 宋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송의 소식과 소철을 사모하여 셋째아들 이름을 김부식으로 짓고, 넷째 아들의 이름을 김부철로 짓는 등 그의 이름속에는 이미 사대의 심리가 배어 있었습니다.
(2) 倭毒(植民主義 史觀)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의 통치를 영구화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史書를 약탈하고 악랄하게 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총독부내의 취조국에서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수색에 나섰습니다. 서울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향교, 서원,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습니다. 다음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 만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 국회사와 문정창씨가 지은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행한 공개된 첫 만행이었습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일제는 당초 3년동안 수색을 하면 그들이 없애고 싶은 서적은 모두 씨를 말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서적의 압수 분서소식을 들은 소장자들이 깊이 감추는 바람에 3년은 고사하고 6년 동안이나 강압적인 서적수색을 강행했으나 씨를 말리지 못하자 무단정치로 악명높던 寺內正?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 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中?院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습니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어쩔 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며,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 齊藤實은 다음과 같은 교육시책을 발표 하였습니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케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 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예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를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自國)의 모든 人物과 史蹟에 대해서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때 일본의 史蹟,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人物을 소개하라. 그렇게 하면 同化의 효과가 至大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半일본인으로 만드는 要訣인 것이다."
식민사관의 폐해는 半島史觀주입, 고대사 말살, 특히 단군의 신화화, 한사군 설치, 광개토왕비문의 조작(1898년 운초 계연수 선생이 탑본할 때 총 1802자 중 117자만 판독이 불능하였지만 1912년 탑본시에는 다시 138자가 판독 불능하였는데, 특히 일본관련 부분이 거의 마멸돼 있다)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모든 분야에서 일제의 질곡으로 풀려나왔지만 국사에 있어서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사관으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3) 洋毒
해방 후 서양학의 영향으로 이룩한 사학을 洋毒이라 할 수 있는데, 식민주의 사학이 中毒 + 倭毒의 복합증상이지 결코 왜독이라는 단순현상이 아니었듯이, 양독이야말로 전근대사학과 일본식민사학을 부합시킨 현대의 괴물사학으로 양독 = 중독 + 왜독 + 양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독의 특징은 고고학을 위주한 실증주의, 문헌고증주의(랑케사학)등을 위주로 하는데, 우리 민족의 고대 강역이 만주, 몽고, 시베리아, 중국의 요령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임을 생각하고 고대사의 자료가 망실된 현실에 있어 민족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큰 독소인 것입니다.
김부식이 자신의 사대주의 사상을 관철시키고,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묘청을 숙청할 때(묘청은 원래 만주는 우리땅이니 '따무르자(되물리자 -> 고토회복 사상)'라며 북벌계획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철저하게 사대주의에 빠진 사람으로 묘청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음.)
(4) 외래종교의 폐해
왜래의 사상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국수주의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외래 사상을 받아들일 줄 아는 민족이라야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제 정신을 차리고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에게는 외래사상이 좋은 약이 될 것이지만,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에게는 왜래사상은 아편이 될 것입니다. 유교는 중국 중심주의를 제창합니다. 중국이 인류의 중앙이고 그밖의 모든 민족은 중국에 예속되는 것이 天理라고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물들게 되면 주체성과 자주독립의 정신이 말살되고 종속적인 사대주의에 철두철미하게 물들게 됩니다.
어떠한 종교도 민족보다는 우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我와 非我도 구별치 못하여 공자가 한국땅에 들어오면 한국속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석가가 이 땅에 들어오면 한국속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한국을 만들려 하였으며, 예수가 이땅에 들어오면 한국속의 예수가 아닌 예수의 한국을 만들고자 광분하였으니, 이제라도 이 미몽에서 깨어나 우리 민족은 조상 받들기부터 잘하여서 근본부터 바로 잡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민족의 바른 역사는?
오늘의 세대는 최인 선생의 다음과 같은 민족의 유훈(遺訓)을 깊이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은 새 역사를 창조할 때이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면 새 역사를 알아야 한다.한국의 재발견은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 한국의 재발견에서 -
그렇다면 본래의 한국을 발견하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아니라 한민족이 유구한 역사속에서 간직하여 온 한민족 본래의 역사, 종교, 철학 등 한민족의 본원적(本源的)인 정신세계를 파악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한민족의 역사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는 우리민족의 참된 역사를 공부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 한민족은 인류역사의 종주국(宗主國)이다.
* "슬프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자 있다면 내 유혼(幽魂)이라도 한없이 기쁘리라." - 규원사화 서문에서 -
오늘의 우리는, 후세에 대해 민족의 정사(正史, 바른역사)를 전하고자 했던 북애(北崖)노인이 남긴 이러한 연민의 정을 가슴 깊이 공명하게 됩니다. 앞으로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환단고기와 같은 민족의 바른역사를 담은 정통사서(正統史書)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통사서들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외래의 사상과 이념에 짓눌려 그 빛을 보지 못하다가 최근에 들어서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밝히고자 하는 在野의 정통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모든 종교는 한민족의 정통종교인 신교(神敎)로부터 흘러나왔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유교, 불교, 기독교, 선교(仙敎)가 나오기 훨씬 이전에 고유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진흥왕 37년에 최치원 선생께서는 난랑비 서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 나라에 현묘(玄妙)한 道가 있으니 이름하여 風流道라.... 이것은 유,불,선 三敎를 포함하느니라.
神敎라는 말은 배달국을 다스리신 환웅천황께서 [以神敎]라 하시어 '신(神)의 말씀으로 가르침(敎)을 베푼다'라고 하신 데서 비롯되는데, 배달도라 불리었으며, 다른 명칭으로는 풍류도라고도 합니다. 유교 2500년, 불교 3000년, 기독교 2000년에 비하여 한민족과 인류의 최초의 종교인 신교의 역사는 한민족과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하기에 9000년을 상회하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신교 -> 배달도 -> 풍류도 -> 화랑도 -> 국선도 -> 동학 -> 한사상
그러면 유, 불, 선, 기독교가 신교로부터 흘러 나왔다는 뚜렷한 증거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1) 유교의 나들이
유교의 정신이 동방 東夷族인 한국의 신교정신에서 나왔음은 흔히들 다음의 중용 30장에 나오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증언으로 자주 인용합니다.
[공자께서 후천 大同세계를 궁극이상으로 하여 펼친 유교 도덕의 원시조는 요, 순과 문왕, 무왕을 본받은 것이라 하였다.]
-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고,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중용 제30장)
또한 요(堯)와 순(舜)임금은 그 혈통이 모두 동이(東夷)족 출신입니다. 요는 황제 헌원의 5세손이라 하고(史記 卷13), 황제는 동방의 우리 백민(白民, 백의민족이라는 뜻)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요임금은 동이족인 것입니다.
맹자는 순임금이 東夷사람이라 증언하였습니다. 유교의 종장인 공자 역시 혈통을 따지면 결코 중국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뚜렷한 증거는 예기(禮記三篇檀弓上)를 보면 [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다]하였는데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 황하유역)지역은 중국학자(徐亮之, 林惠祥등)들에 의해서도 여기에 살던 은족(殷族)은 곧 동이사람이라는 것이 통설화 되어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유교의 정신적, 혈통적 뿌리가 신교의 종주국인 동방한국에 두고 생겨나서 역수입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불교의 나들이에 대한 증거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불교의 원형]이 한국에 실존해 있었다는 충격적인 역사적 사실이 많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몇해전에 이미 고인이 된 복초(伏草) 최인(崔仁)선생은 심혈의 역작인 [한국의 재발견]에서 "한국이 불교의 본래 발상지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임승국 교수의 말과 같이 그가 던진 엄청난 파문의 투석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를 실증해 주는 많은 역사적인 實例 가운데 몇가지 만을 살펴보겠습니다.
◆ 아도화상(阿道和尙)의 어머니 고도령(高道寧)은 그의 아들인 아도를 신라에 보내면서 "이 나라(신라)는 불법을 알지 못하나 그 경도(京都)안에 절터 7처(處)가 있으니 이는 모두 전불시(前佛時; 석가부처님 以前의 부처시대)의 절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도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하기 전에 한국에 부처가 있었으며 불교의 원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과 제가전기(諸家傳記)에 모두 이르기를 "신라의 월성동용궁(月城東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으니 그 곳은 전불시(前佛時)의 절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본사(本師) 석가불은 제4존불(尊佛)이며 가섭불은 제3존야(第三尊也)라고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석가불 이전 가섭불(迦葉佛)시대에 이곳이 불국사(佛國寺)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한민족의 특징은 백의(白衣)입니다. 그런데 고대에 인도인이 백의를 입고 관세음보살이 백의(白衣)를 입음으로 백의대사(白衣大士)라고 합니다.
◆ 화엄경에는 불교의 종주국이 바다 건너의 나라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해중(海中)에 금강산(金剛山)이 있는데 옛날로부터 모든 보살들이 그 산중에 살고 있으며 현재도 법기(法起)라는 보살이 1,200명의 보살의 무리를 거느리고 금강산에서 상주하며 진리를 강설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법기는 중국 동진(東晋)시대(317 ~ 419년)사람인 담무갈(曇無竭)을 말한다. 옛날부터란 동진이전의 시대로서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372)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인 선생과 임승국, 송호수 교수의 말과 같이 중국과 인도에서 한국 불교도들이 한국을 찾아 온것은 본산지인 성지(聖地) 순례(巡禮)를 하기위해 모국을 찾아와서 수도하였다는 말입니다.
3) 기독교의 나들이
기독교의 역사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의 뿌리는 바로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고대국가인 환국(桓國)의 12 제후국중에서 [수밀리]라는 한 국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중근동(中近東)의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개척한 족속은 동방(東方)으로 부터 이주해온 슈메르족이었으며, '슈메르'는 '수밀리'라는 단어가 음가(音價)만을 달리 했을뿐 같은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인 것입니다.이것은 곧 기독교의 근원이 우리 한민족의 정신세계인 환국(桓國)의 신교(神敎)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기독교가 한민족으로부터 비롯된 구체적인 증거를 하나하나 찾아 보겠습니다.
◆ 크렘머와 다글라스氏(美)
-슈메르인은 東方으로부터 왔다.
◆ C.H 고든박사(英)
-슈메르인들이 중근동(中近東)에 들어오기 前에 무슨 고대문자적(古代文字的)기호를 가지고 온듯하다.
◆ 上野景福(日本)
-슈메르인들이 사용한 설형문자는 약 5000년전 태호복희씨(동이족)가 사용한 8괘 부호등과 비슷하다.
◆ 大英百科辭典
-슈메르語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서 그 語根을 같이 한다.
◆ 삼성기(三聖記)<국내자료 : 환단고기>
-고기(古記)에 이르되 桓因氏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넓이가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이니 통괄하여 桓國이라 하였으며 그 환국에는 分國이 12나라였다. 그 12국 가운데 우르(虞婁 : Ur)國과 슈메르(須密爾 : Sumer)國이 끼어있다.
-기독교 진리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모세五經의 뿌리를 살펴봄으로서 과연 기독교가 어디로부터 연유(緣由)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모세의 5경인 구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에 쓰여진 제사음식.性행위.종족번식.사회규율 등의 율법은 그 제정 유래 및 각 法條의 형식과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이 함무라비法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무라비法의 기원은 바로 한민족과 인류최초의 법전인 수메르법전에 둘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예를 봅시다.
◆ 뮐러(Muller)
-유대인의 시조(始祖)인 아브라함이 우루 땅에서 함무라비 왕의 고향인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 오면서 함무라비 법전을 가져 왔을 것이다.
◆ 크레이(Clay)와 루즈(Lutz)
-바빌로니아의 제1왕조의 제6대왕인 함무라비(BC 1704 ~ 1662년)왕이 공포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의 창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존재했던 슈메르 법전의 수정 보수판이다.
◆ 中田薰(일본 : 前동경大교수)
-모세 5경의 母法은 함무라비法이고 함무라비法의 母法은 슈메르법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방 한민족의 한 지류(支流)인 수밀리(=수메르)족이 유프라테스.티그리스강 유역으로 흘러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키고, 이 문명이 곧 기독교 문명을 태동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은 이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태어난 슈메르인의 후손으로서 성장 후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유대교를 창설한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인 모세는 자기 민족의 수호신인 여호아를 중심으로 한 자기 민족의 정신적 단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유대교의 사회 환경속에서 성장한 후 율법의 형식주의와 유대교인들의 타락을 보고서 그 한계점을 극복한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교인들에 의해 신흥 사이비 종교의 교조란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형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기독교의 형성이 한민족과 인류의 뿌리종교인 한민족의 신교(神敎)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도교(道敎)의 나들이
일반적으로 중국의 道敎始祖를 황제와 노자라고 하는데 황제의 혈통은 동이족입니다. 노자의 국적도, 한(韓)씨의 성을 이(李)씨로 바꾸면서 자신이 동방 사람임을 말하였듯이 모두 동이족의 한국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제가 중국에서 폈던 도교의 가르침은 동방 청구국(靑邱國, 치우 천황 때의 우리 국호)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府)선사(仙師)를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음부경이라 불리우는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갔다는 사실을 보면 도교의 뿌리가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한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신교가 점점 퇴화하면서 다른 3대 종교와 더불어 역수입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9번 국통(國統)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9개의 국호가 다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민족과 인류 최초의 국가인 환국(桓國)은 광명의 나라, 배달국(倍達國)은 광명이 비친 땅, 조선(朝鮮)은 아침의 해가 빛난다는 뜻, 부여는 아침에 먼동이 뿌옇게 밝아온다는 뜻, 고구려는 高大光麗 즉, 높고 크고 빛난다는 뜻, 大震의 震은 '동방 진'자이니 역시 광명이 처음 올라오는 곳이요, 발해(渤海)란 뜻도 광명의 바다 또는 불의 해란 뜻이니 광명의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고려, 조선을 이어 大韓民國의 韓도 광명을 뜻하는 것('밝을 한', '큰 한')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 민족은 하늘의 광명을 이어 받아 자기 자신의 마음속의 어둠의 찌꺼기를 다 제거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어둠과 악까지를 모두 제거하여 대광명(大光明)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세계를 여는 사명을 부여받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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