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한국인

노블리스 오블리제[펌]

산과 물 2006. 8. 28. 17:29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생각한다

글쓴이 : 박선협 ( mest ) 글 올린 시간 : 2005-03-27 오전 7:08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란 말은 프랑스어에서 나왔다.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즉 귀족들의 의무(Obligation of the noble)' 를 뜻한다. 이것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도덕적 책무(責務)를 일컫는다. 이 말의 뿌리는 멀리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을 가졌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하였음은 물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었다.

자연히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하나의 풍조로 자리매김이 이루어졌다. 특히 귀족 등의 고위층이 전쟁과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전통은 더욱 확고했다. 한 예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C247-BC183)이 로마에 대항하여 BC 219 년부터 벌인 16년간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들 수 있다. 이 전쟁에서 로마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Consul)의 전사자 수만 해도 13 명에 이르른 것을 보면 그 정신의 연원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집정관이라면 로마 공화정(共和政) 시대의 행정 및 군사의 최고 지도자였다. 공화정 말기에는 문무(文武) 지상권(至上權)을 가지고 속주(屬州)를 통치하였으며 그 권한은 거의 무제한이었다.

이러한 집정관이 죽음이 기다리는 전장의 전면에 흔쾌히 나선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고대 로마의 최고 기관인 원로원(元老院, Senatus) 의원들 구성에서도 잘 드러난다. 입법, 자문 등의 국정활동과 집정관 선출 등의 활동을 한 원로원은 로마 건국자 '로물루스'가 설치하였다. 공화정 때는 원로원의 권위가 매우 높아져서 국정운영의 실질적인 중심기관이 되었다. 원로원 결의는 법률과 똑같은 효력을 가졌다.

그런데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 든 사실이 특이하다. 그 이유를 보면, 계속되는 오랜 전투 속에서 귀족들이 수도없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정(帝政) 이후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고 귀족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 지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권력과 특권을 향유하는데만 급급하였을 뿐, 자신들의 사회적 의무와 솔선수범의 봉사정신은 소홀히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사회적 발전의 역동성이 흔들림은 물론, 조정력을 상실, 급속히 쇠퇴한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근대와 현대의 바로미터로

계층대립 해결의 최고수단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비단 로마인들의 덕목만은 아니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귀족들의 도덕의식은 사회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게 되면 국민을 통합하고 국가적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전쟁사의 미스터리라고 말하는 워털루전투(Battle of Waterloo)도 결국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설명자료라 할 수 있다. 1815년 6월, 나폴레옹 1세의 지배를 결정적으로 종식시킨 이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125,000 여 명의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한편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 지휘하의 영국군은 95,000 여 명, 블뤼허가 지휘한 프로이센군 12 만여명 등 도합 20 여만 명의 연합군은 벨기에 남동쪽 위털루 남방 교외에서 맞물려 대치하였다.

6월 16일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하였으며, 사기가 충천한 프랑스군은 18일 영국군에게 총 공격을 개시하였다. 비록 4 만여 명의 프로이센군의 지원이 있기는 했지만 사기나 병사들의 전투 경험으로 미루어(많은 영국 병사들은 인근에서 급하게 모집한 자원병들이었다) 영국군으로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전투였다.

그러나 천만뜻밖에, 예상과는 달리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4 만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전사자도 각각 15,000여명, 7,000여명에 이르렀지만).

이 결정적 전투에서 패한 나풀레옹은 6월 22일, 돌아오지 못할 귀양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영구히 유배되는 치욕의 결과를 안고만다. 그러면 객관적 전력이 열세였던 영국군이 승리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전사자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프랑스군 전사자들 중에는 주로 하층민들이 많았다. 반면 영국군 전사자들 중에는 이튼칼리지(Eton College) 출신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귀족 자제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1440년 헨리 6세에 의하여 창설된 '이튼칼리지'는 주로 상류 부유층 자제가 입학하했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이나 사관학교 등으로 진학하여 영국의 지도자가 되는 일종의 “귀족 양성 학교”였다. 그런데 이 학교 출신들, 즉 귀족들의 자제들이 전투에 앞장을 서자 서민 출신 군인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워 이긴 것이다.

이런 영국의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제 1, 2차 세계대전 중에 이튼칼리지 출신들의 전사자들이 무려 2,000여명에 달했다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무력 점령으로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 때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가 참전한 것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체적인 예로 꼽힌다.

75일간 지속된 이 치열한 전쟁으로 영국군은 452명,아르헨티나군은 630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런 위험한 전장에 여왕의 아들이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것이다. 이들은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이용하여 병역을 기피하기보다, 도리어 최 전방에 나가 생명을 걸고 나라를 지킴으로서 자신들의 명예로운 정체성과 리더십을 지켰다.

이런 현상은 한국, 우리가 겪은 동족상잔 6,25 전쟁 때에도 수 없이 볼 수 있었다. 근자에 이르러 소위 개혁, 진보세력들이 외세라고 지목, 그들로부터의 '자주'를 들먹이는 바로 미국군 장성의 아들들이 무려 142 명이나 참전해서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 중에서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1892-1992) 장군의 아들은 야간폭격 임무수행 중 전사했다. 후에 미국 대통령(1953-1961재임)이 된 아이젠하워(Eisenhower, Dwight David, 1890-1969) 장군의 아들도 육군 소령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중국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볼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주석은 6?25 전쟁에 자기 아들을 참전시켰다. 그리고 그 아들은 치열한 전투 속에서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의 시신 수습을 하지 말라고 특별히 지시했다.

주석의 아들이니 그 시체를 찾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희생될 것을 알고 내린 지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인해 마오쩌둥은 10억의 중국을 이끌 수 있었다.

역사를 돌아볼 때 큰 영향력을 미쳤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희생과 봉사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한 나라나 단체에서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결국 존경심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존경심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희생과 봉사로 부터 생기는 것에 다름아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존경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도자들에게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엄격한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대 로마가 그랬고 영국이 그랬으며, 미국이, 심지어는 중국이 그랬다. 비단 그 지도자는 정치뿐이 아니다, 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이 없는 사회는 마치 윤활유가 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같이 온갖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존경이 없는 사회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짐승들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상층 집단이 이런 의무와 덕목을 갖춰 왔던 것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서구 상층은 과거 중세 귀족 신분으로 누려 왔던 특권들이 부분적으로 약화됐더라도 여전히 경제적 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상위 1% 집단이 전체 부富의 30% 정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상층의 상층'이라 할 수 있는 1% 집단이 현대판 노블리스를 이루고 있다.

이 상층 집단은 단순히 경제적 부(富)만이 아니라 교육과 연줄망에서 일반 국민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어느 나라이건 상층 집단은 유명 사립고교와 명문 대학에서 교육받아 강력한 연줄망을 형성해 왔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 집단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통혼 전략을 통해 그 연줄망을 강화해 왔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세를 독점하는 만큼 이들은 이에 대한 윤리,도덕적 의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층집단의 바람직한 전략, 요컨대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상층 집단의 바람직한 태도이자 전략이다. 전통적으로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윤리적 덕목과 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것이 다름 아닌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이뤄 왔다.

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에 대해서는 상이한 견해가 존재한다. 한편에서 그것은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상층 집단의 규범적 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 집단의 보수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비판되기도 한다.

자기성찰을 위한 잣대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서도 급속한 산업화의 결과 현대식 상층 집단이 형성돼 왔다. 하지만 한국의 상층은 오히려 `오블리제 없는 노블레스' 즉, `의무를 망각한 신분 집단'에 가깝다. 우리 상층의 이런 특성은 무엇보다 화폐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식' 천민(賤民)문화에서 기인한다. 이 천민문화는 기실 `천민적 졸부'의 문화이며, 이들에게 오블리제란 경제적 낭비이자 사회적 과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다만 최근 기부 활동을 포함해 상층 집단 일부에서 부의 사회적 환원이 점차 늘어나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욱이 그것은 소박한 자선 행위를 넘어서서 재단 창립과 '기부문화 정착' 등으로 제도화되어 가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자기의 위치에 따른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윤리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할 때 사회적 위치는 자연히 빛나 보이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지도자들의 도덕적 수준이 낮다는 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배신감은 정말 심각하다.

정치, 경제, 종교 등 각 분야의 지도자들의 비리가 날마다 보도된다. 누가 얼마를 먹었다는 얘기가 시도 때도 없이 훤호(喧呼)된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두들겨 맞는다고 “억, 억”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최근에는 돈 떼먹는 소리가 “억, 억”하고 들렸다.

공공연한 뇌물수수, 위장이민, 원정출산 등 온갖 편법, 탈법이 동원된다. 우리나라의 많은 노블리스(noblesse)들은 본인은 물론 자식들까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복잡한 질병과 이런 저런 사유로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병역을 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삶의 기회(life chance)를 독점하고 있다는 의구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거대한 부를 축적한 어떤 노블리스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100만원 짜리 월급쟁이보다도 적은 의료보험료를 내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노블리스들은 권리에만 충실하고 그에 따르는 의무(oblige)를 소홀히 한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교단의 총회장이 되기 위해 몇 억, 몇 십억을 뿌렸다는 얘기도 들리고, 목회세습으로 인한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대학교 총장이, 그리고 교수들이 뒤질세라 비리의 칼 바람위에서 춤추는 세태다.

이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되면 그 단체 혹은 사회는 타락하고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한편의 드라마 '타이타닉호의 최후'로 다가가 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회적 진면목을 살피는 감동장면을 볼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일등석에 탔던 상류사회 인사들이 보여준 ‘원칙에 의 복종’, 그것은 우리에게 타이타닉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마치 동화같은 착각 속으로 빠져 들게 한다.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영화에서 의자에 앉아 브랜디 한 잔을 든채 자신의 시종과 함께 타이타닉 최후의 순간을 지켜본 인 물이다.

아비규환 속에 최후를 맞은 그는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 철강 재벌이었다. 뉴욕의 유명한 ‘구겐하임 현대미술관’에 이름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인물. 영화에서는 노인으로 묘사됐지만 사실 당시 구겐하임은 46세의 한창 나이였다(카메룬은 아마도 구겐하임의 태도를 ‘살 만큼 산 노인’의 자포자기쯤으로 처리해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자와 아이 우선’이라는 구명 보트 승선의 원칙을 지켰고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자 구명 조끼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시종에게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We‘ve dressed up in our best and are prepared to go down like gentlemen)” 고 말한다. 만찬용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브랜디 한 잔을 들고 영화 속에서 보는 바로 그 모습대로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구겐하임은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시종에게 “아내에게 내가 나의 의무에 최 선을 다했다고 전하라(tell my wife I’ve done my best in doing my duty)“고 유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한 명의 인물 존 제이콥 애스토어(John Jacob Astor). 그는 타이타닉의 승객들 중 단연 최고의 부호였다. 지금 뉴욕 최고의 호텔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포 함해 각국의 정상들이 뉴욕을 공식 방문할 때 의례적으로 묵는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의 소유주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내는 구명 보트에 올랐지만 그는 구조의 우선순위 에서 밀렸다.

영화에 그려진 대로 결국 그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밀려드는 바닷물을 바라보게 된다. 이사돌 스트라우스(Isador Straus)는 지금도 미국 최대?최고의 백화점인 메이시(Macy)백화점의 공 동 소유주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여자와 어린이 우선’원칙에 따라 그의 아내 아이다(Ida)는 구명 보트에 승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에게 “당신과 함께 하겠다(Where you go, I go)”며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남는다.

영화에서 선실 침대에 마주보고 누워 서로를 위로하며 최후를 맞는 잘 차려입은 노부부가 바로 이들이다. 잭(Jack)과 로즈(Rose)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네가 뛰어들면 나도 뛰어든다 (You jump, I jump)”라는 대사는 짐작컨대 카메룬이 이들 부부의 마지막 말을 패러디한 것일 듯싶다. 이들 말고도 일등석의 내로라 하는 많은 명사들이 그렇게 “갔다.”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노불리스 오블리제' 처럼 회자되는 덕목이 흔하지 않다. 그것이 사회각계의 기반으로 자리매김 될 때 나라의 성장과 풍요, 나눔의 동력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