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재 교수님은 한국학중앙연구소의 세종연구소 소장님으로 계시는 분이시며,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리더십을 연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정윤재 교수님께서 지난 10월 4일 개천절을 맞아 <동아일보>에 기고하신 글을 올려 드립니다.
[동아광장/정윤재]신나게 단군을 이야기하자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의 시원(始原)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일본에서처럼 배타적인 ‘종교’로 둔갑해 역사 조작의 근거가 되기도 하고, 이스라엘에서처럼 공동체 형성과 유지의 바탕이면서도 ‘고고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민족 시원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이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나오고, 그에 바탕을 둔 다양한 상상력이 넘쳐 나는 건강한 대화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말(communication)이 풍성해야 마을(community)도 만들어진다.
단군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단군사당 혹은 단군릉이 만들어졌는데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철거된 뒤 1936년 전국적인 모금운동에 의해 복원됐다. 그러나 일제는 동화정책을 밀어붙이며 각종 문헌이 전하는 단군 이야기들을 허황된 것으로 낙인찍고, 이에 대한 공적인 언급과 교육을 금지했다. 총독부와 관변 학자들은 조선민족이 본래 고대사가 허술한 민족이며 타율적이고 정체된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열등한 민족이라고 묘사하면서 조선사 말살을 기도했다.
그러던 1932년 여름 어느 날. 당시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은 현진건 기자를 불러 평양 출장을 명했다. 송 사장은 벌써부터 민족불멸론에 입각해 단군, 세종, 이순신을 함께 모시는 삼성사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단군성적(檀君聖蹟) 순례에 동아일보도 적극 참여하도록 했고, 그 일환으로 현 기자에게 평양 강동면의 단군유허지를 취재하도록 한 것이다. 1934년 1월에는 단군릉 수축(修築)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동아일보의 이 같은 단군현양사업도 역사적 유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 태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우리나라는 중국 천자의 분봉국(分封國)이 아니고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와 개국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환단((원,환)壇)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이 전통에 따라 세종도 원년에 환단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신 구월산 삼성사에 신하를 보내 제사지냈다.
세종 7년 9월 25일, 평양에 들른 정척(鄭陟)은 단군조선이 기자조선보다 시기상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오가는 중국 사신들이 참배하는 기자사당 안의 단군신위가 곁방살이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문제 삼아 “단군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단군신위를 남향하게 하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제대로 제사하게 하는 것이 왕조의 체통에 맞는 일”이라는 글을 올렸고 세종은 즉시 이를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정조 10년 8월 9일에 임금은 승지 서형수(徐瀅修)에게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고 단군묘의 알뜰한 관리를 명했다. “신이 강동(江東)에서 벼슬할 때 고을 서쪽 300리쯤에 둘레가 410척쯤 되는 무덤이 있었는데 고을 노인들이 단군묘라 했고, 이는 유형원이 쓴 ‘여지지(輿地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중국 사람들은 죽은 후에 신령이 되었다는 황제(黃帝)가 교산(喬山)에 신발을 남겼고, 공동산(공동山)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믿고 이를 전하고 있는 터이니, 이렇게 전해지는 국조의 묘에 대한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은 흠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는 200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잘 정비된 단군릉을 볼 수 있었다. 단군릉은 물론 체제 정당화의 한 방편으로 북한 정권에 의해 1994년 새로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평양의 단군릉과 단군사당에 관한 이야기들은 문헌적 근거가 분명한 것이어서 얼마든지 우리의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에도 우리의 단군이야기는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남긴 식민사관을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건강한 역사의식을 충분히 가꾸지 못한 탓이다. 개천절 기념식장에서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하는 노래는 들리지만 그 내용과 형식은 여전히 초라하다. 우리의 단군이야기가 일본에서처럼 배타적인 종교로 흘러서는 절대 안 된다. 입에서 입으로 풍성하게 이어지는 이야기(discourse)이면 족하다. 과거보다 훨씬 생기가 돋은 우리의 그 많은 입이 단군이야기들을 더 많이 말하고 발랄하게 떠들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줏대(identity)가 생기고 이웃나라들의 역사 왜곡을 넉넉하게 감당할 내공이 쌓인다. 내년 개천절은 올해보다 더 알차야 한다.
정윤재 객원논설위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tasari@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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