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진화란 없다.
글 최재천 /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다윈 자신의 연구에서도 보듯이 식충식물의 적응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그 밖에도 온갖 적응 현상들을 들여다 보노라면 오랜 세월 자연선택에 의해 다듬어지면 생명체는 결국 완벽에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처럼 느껴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종교계도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궁극적으로 신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완벽한’ 인간이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여 큰 반발 없이 다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은 생명체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메커니즘인가? 나의 답은 “결코 아니다”이다. 그럼 지금부터 왜 자연선택이 생명체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환경이 언제나 일정하기 않기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물론 그럴 능력은 없지만 만일 어느 생명체가 자신의 자손을 더운 날씨에 잘 견디는 방향으로 ‘진보’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자. 아주 오랜 세월 지구온난화가 지속된다면 어쩌면 성공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구가 종종 기온이 오르는 듯 하다가 졸지에 빙하기를 맞았듯이 몇 년 후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 더위에 잘 견디도록 준비시킨 자손들은 하루아침에 절멸하고 말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국가마다 가장 거대한 슈퍼컴퓨터는 대개 기상청에 있다. 그런데도 기상청은 여전히 바로 내일의 날씨를 예보하는 일도 어려워한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국제 기준에 비춰볼 때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다만 완벽할 수 없을 뿐이고 가끔 틀릴 때마다 우리는 용서에 지극히 인색한 게 사실이다. 미래 예측이란 애당초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당장 내일 날씨도 예측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다음 세대의 환경 조건을 예측하여 그에 맞도록 진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얼마간은 환경이 그런대로 일정하게 유지되다가도 홀연 급변해온 것을 알 수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제 아무리 자연선택이라도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둘째, 생물의 진화에는 온갖 형태의 제약들이 있다. 우리 인간에는 영원히 풀지 못할 ‘이카루스의 열등의식’이 있다. 우리가 진정 완벽한 생물이라면 적어도 날개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원해도 날개를 갖지 못한다. 날개를 만들어주는 유전자가 우리 유전체 안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전적 제약(genetic constraint)의 결과이다. 인공 비행체를 만들어 어느 정도 한은 풀었지만 날개가 없는 우리 인간을 자연계의 다른 동물들이 가장 완벽한 동물로 인정할 리는 결코 없다고 본다.
생물의 기관들 중 가장 탁월한 기관으로 흔히 척추동물의 눈을 든다. 생리학자들은 척추동물의 눈을 인간이 개발한 가장 훌륭한 사진기에 비교하며 감탄해 마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사진기라도 두 줄 세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완벽하게 초점이 맞도록 찍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눈은 어떤가? 교실 가득 학생들이 아무리 여러 줄로 앉아 있어도 모두를 완벽한 초점으로 볼 수 있다. 신학자들도 인간의 눈을 칭송하며 이처럼 완벽한 기관은 오직 하느님만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윈의 자연선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설명을 내놓은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그의 저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다름 아닌 인간의 눈을 예로 들어 신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라는 새로운 포장을 들고 나온 현대판 자연신학자들도 어김없이 눈의 기능적 탁월함을 신의 영역으로 돌린다.
그런데 정말 척추동물의 눈은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가? 공교롭게도 척추도 없는 무척추동물 중에도 우리와 상당히 비슷한 구조의 눈을 가진 동물들이 있다. 바로 오징어, 문어, 낙지 등의 연체동물이다. 오징어의 눈과 우리 인간의 눈을 위아래로 잘라 단면을 비교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서로 전혀 다른 진화의 역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구조와 기능을 갖게 된 이른바 ‘수렴진화(convergent evolution)’의 좋은 예이다. 그런데 오징어의 눈과 우리 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새 한 가지 뚜렷하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시신경과 실핏줄이 망막의 뒷면에 붙어 있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망막에 구멍을 뚫고 시신경과 실핏줄을 동공 안으로 끌어들여 망막의 내벽에 붙여 놓았다. 도대체 왜 멀쩡한 스크린에 구멍을 뚫고 깨끗한 상이 맺혀야 하는 스크린의 앞면에 그것들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것일까? 과연 오징어와 인간 중 누가 그런 어리석은 구조를 가진 눈의 소유자일까? 답은 뜻밖에도 우리 인간이 그런 비합리적인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시각적 맹점(Blind Spot)을 갖고 있다. 시신경 다발을 눈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뚫어 놓은 구멍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눈 높이에 들고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만 지우개 끝에 초점을 맞춘 다음 눈의 방향을 고정시킨 채 연필을 서서히 오른쪽으로 움직여 보라. 연필이 시선 방향으로부터 약 20도 정도 움직인 지점에 이르면 지우개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왼쪽 눈도 마찬가지로 중앙선에서 약 20도 왼쪽 지점에 맹점을 가지고 있다.
망막 위에 분포하는 혈관들도 그들의 그림자 때문에 여러 작은 맹점들을 만든다. 어쩌다 혈관들을 망막 위에 붙여 놓는 바람에 생긴 이 문제 때문에 비유를 하자면 진화의 역사 내내 엄청난 소비자 진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리콜(recall)’을 하여 문제를 해결을 위해 노력한 결과 우리 눈은 순간순간 조금씩 다른 각도를 보려고 끊임없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이같이 엄청난 양의 정보가 두뇌에 전달되어 끊임없이 분석 종합되는 덕분에 우리는 우리 시야에 있는 영상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잘못된 설계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진 못하고 그저 보완책을 강구한 것이다.
이 같은 이른바 역망막(inverted retina) 현상은 단순한 시각감손은 물론 각종 심각한 임상 문제들을 일으킨다. 대수롭지 않은 출혈도 망막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 수 있어 심각한 시각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또 간상세포와 원추세포들이 망막으로부터 쉽게 분리되어 눈 안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일단 이런 증상이 발생하면 그 진행속도가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받지 않으면 시각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 안과 의사들이 가장 많이 하는 수술이 백내장 수술이고 그 다음이 바로 망막 박리 방지 수술이다. 이런 여러 설계 상의 문제점을 고려해볼 때 오징어의 눈이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셈이다. 만일 내가 완벽한 눈을 설계하는 사람에게 상금 1억 원을 주겠다며 공모를 했을 때 멀쩡한 망막에 구멍을 내는 설계도를 제출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 인간의 눈은 이렇게도 불합리하게 만들어졌는가? 자연선택은 왜 좀더 완벽한 설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문제는 바로 인류가 거쳐온 진화의 역사에 있다. 뒤집힌 망막의 설계는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모든 척추동물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이다. 척추동물의 눈은 작은 조상동물들의 투명한 피부 밑에 있었던 빛에 민감한 세포들로부터 발달했다. 당연히 이 세포들에 혈관과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상태에서는 다분히 합리적인 설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수억 년이 흐른 오늘에도 빛은 어쩔 수 없이 혈관과 신경들을 지나쳐야만 시각세포에 도달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설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진화에는 이처럼 역사적 제약(historical constraint) 또는 계통적 제약(phylogenetic constraint)이 있다.
어처구니 없는 역사적 제약 때문에 애꿎게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물이 기도에 막혀 목숨을 잃는다. 갓 앞니가 나온 아이들이 특별히 자주 희생의 제물이 된다. 소시지나 당근을 앞니로 끊어 삼키다가 변을 당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몇 차례씩 저녁 뉴스 시간에 이른바 하임리히(Heimlich) 응급처치를 훌륭하게 해내며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하는 엄마의 목숨을 구한 꼬마들이 등장한다. 기도에 음식물이 막혀 캑캑거리는 엄마의 명치를 주먹을 쥔 채 순간적으로 압박하여 막혀 있던 음식 덩어리가 튀어나오게 한 꼬마에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유치원 또는 캠프에서 배웠다고 대답한다. 우리도 하임리히 응급처치 방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 들이마신 공기와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이 목 부위에서 무슨 까닭인지 애써 교차하며 서로 자기 관을 찾느라 애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를 테면 교통사고들이다. 입보다 위에 있는 코를 통해 들어온 공기가 애써 목의 앞쪽 관으로 올 필요가 없도록 기도가 식도 뒤에 위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우리 몸은 어찌 보면 식도와 기도의 위치가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반면 코 밑에 있는 입을 통해 들어온 음식물은 억지로 기도의 뒤에 위치하는 기도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 문제 역시 소비자들의 빗발치는 원성에 못 이겨 거의 눈가림 수준의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그게 바로 후두개(喉頭蓋; epiglottis)이다. 후두개는 우리가 음식을 삼킬 때는 기도를 막았다가 숨을 들이마실 때에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때로 실수를 하게 되면 음식물이 기도를 막게 되는 것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구조적 결함 역시 다 조상 탓이다. 그 옛날 우리가 물고기였을 시절에는 물 속에서 아가미로 호흡을 했다. 입으로 물을 들이마신 다음 아가미를 통해 빠져나갈 때 산소를 걸러 마시던 물고기들 중 일부가 뭍으로 올라가기 위해 숨쉬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숨쉬기 운동을 하려고 생겨난 콧구멍이 배에 있는 물고기보다 등에 있는 물고기들이 훨씬 유리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이 때 엇갈린 두 관의 위치를 바꾸지 못한 채 대대로 물려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 무슨 재료라도 가져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공학자와는 달리 자연선택은 이처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들 것 가지고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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