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연습
고백
산과 물
2005. 10. 14. 09:50
고백
나는 죽었다.
알량한 사랑을 지키겠다는
미명으로 얼버무리며
나는 죽었다.
껍질 앙상하게 남은
등걸만 늘어져
인간의 탐욕에
질질 끌리어 부끄럼 없이
매달려 간다.
두 눈을 뜨고
내 모습을 보려 해도
눈 덩이 박힐 자리엔
갈고리 같은 검지와 중지가
기어들어갈 뿐이다.
인연의 정분을 씻지 못하여
나는 내 몸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며
심장과 쓸개를 밤 새워
씹어 먹었다.
벗이여
나를 부르지 마오.
오직 나에게 남은 것은
등걸 가죽 쭈그러진 그늘에
아버지라는 멍에가 있을 뿐이다.
반만년 유구한 유전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왔건만
오늘 난 죽음의 물을 마시고
뻔뻔스럽게도
부끄러운 반쪽을 살고 있다.
진리, 종교, 사상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죽음의 물을 앞에 두고
나는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스스로 한민족의 고유사상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했거늘
"모든 집착에서의 해탈을 꿈꾸는
풍류(風流)의 삶을 꿈꾸었노라."고
애써 변명하지만
난 사랑도 얻지 못했다.
인간다운 사랑을 위해
자신의 아집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나에게는 없다.
유구한 조상의 얼이 있다면
내 자랑스러웠던
부끄러운 삶을
도살할 수는 없을까?
미천한 목숨도 업연에 의해
태어났다지만
이젠 형상의 실체를 떠나
가을 하늘을 나는 구름이고 싶다.
10월 13일 율면에서 한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