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
석축에 핀 상사화를 보고
한관흠
일상의 반복되는 업무, 날카롭고 메마른 전자파에 지쳐
잠시 은밀한 나만의 꿈 동산을 찾았습니다.
메마른 시멘트 울타리 공간에서 가장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을 수 없는
나만의 비밀한 웃음이 넘치는 곳
시들어 가는 나의 삶의 모습 생각하며
잠시나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다가 층층이 쌓은 돌축대 사이에서
나의 꽃밭에 相思花의 연초록 싹이 돋았습니다.
남들은 꽃과 잎이 어울려 봄을 즐긴다지만
상사화는 봄철내내 잎만 무성하다가
무더운 여름철 잎이 녹아 없어져야
비로소 외롭고 황홀한 사랑을 불태우는 상사화
어쩌면 우리들의 사랑도 상사화처럼
존재할 땐 존재의 가치를 모르다가
사라지고 난 후, 그리워하고 또 아쉬워하고
사랑의 대상이 연인이든 부부든
아니면 육친의 혈육이든 스승과 제자의 사이든
존재할 땐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마음속에 사무칠 듯이 존재하는 허상
하지만 어쩌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야말로
우주의 오묘함이자 삶의 이치가 아닐까?
상사화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워할 때
정말 순수한 사랑은 아닐까?
짝사랑처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나를 불태워 보이지 않게 사랑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정열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면
뜨거운 햇살아래 시들어 죽을지언정
상사화처럼 꽃은 무성하리외다.
그러나 우리는 곁에 있는 존재조차도
순간의 필요에 의해서 잠시 기억하고
도구의 기능을 상실한 순간
너무 쉽게 잊어 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따스한 사랑의 봄볕을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사람들에게 사랑의 불씨를 나눌 수만 있다면
인간미 넘치는 그런 세상이 될 수만 있다면
내 비록 상사화처럼 처참한 모습이 될지언정
기꺼이 가리외다.
봄의 서정을 느끼며 2004. 3. 22 한관흠